Part 1
인천의 낡은 방앗간 공장 서재는 고요했다.
유리창 밖으로는 낡은 방직 기계들이 쿵, 쿵, 쿵 하는 규칙적인 소음을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오래된 목조 건물 특유의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갓 빻은 밀가루 냄새가 뒤섞여 공기 중에 떠다녔다.
박민수(64)는 낡은 참나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남동생 민규(58)가 어렵사리 구해 온 오래된 장부가 들려 있었다.
표지는 헤지고 닳아 너덜너덜했지만, ‘1951년 피난민 토지 위탁 장부’라는 손글씨는 아직 또렷했다.
장부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70년 넘게 가문을 짓눌러 온 거대한 거짓의 증거였다.
민수는 떨리는 손으로 황갈색으로 변색된 종이들을 넘겼다.
여기저기 잉크가 번지고 얼룩진 페이지 속에서 잊혔던 이름들이 다시금 존재감을 드러냈다.
몇몇 페이지는 핏자국처럼 붉은 반점들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피난길에서 죽어간 이들의 마지막 흔적 같았다.
민수의 시선이 한 줄에 멈췄다.
‘박창섭 위탁. 고 박용택 외 2인 토지 대리 관리. 인천 부평동 78-3번지 외 2필.’
이름 세 글자가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박용택. 그는 아버지가 항상 언급하던 전우이자 동업자였다.
아버지는 늘 박용택이 전쟁 중 사망하면서 자신의 재산을 자신에게 맡겼다고 설명했다.
민수는 재빨리 장부의 다른 페이지들을 뒤적였다.
그리고 그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박용택과 함께 이름이 적힌 두 명의 전우, 즉 고 김동준과 고 이영호 역시 사망 일자가 같았다.
그들 모두 아버지가 생전에 자신의 사업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고 말했던, 바로 그 땅의 원래 소유주들이었다.
이 장부는 그 땅들이 위탁이 아니라, 사실상 강탈당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었다.
‘고 박용택 외 2인의 유족들 사망 후 연락처 없음.’
그 아래에는 조악한 글씨로 이런 문구가 추가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가난한 유가족들을 찾아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아니, 어쩌면 아예 찾을 생각조차 없었을 것이다.
민수의 눈은 장부의 다른 부분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아버지가 “우리가 정당하게 산 것”이라고 늘 주장했던 인천 공장 부지와 방앗간 건물 대지의 초기 소유주 명단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 역시 박용택 외 두 전우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1951년의 혼란 속에서 전우들의 피 묻은 유산을 가로챘고, 그 위에 이 거대한 공장과 방앗간을 세웠던 것이다.
수십 년간 이 공장에서 흐르던 기계 소리는 사실 전쟁 영웅들의 비명 소리였다.
민수의 손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그의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60년 넘게 아버지의 그림자 아래에서 이어진 그의 삶이 한순간에 산산조각 나는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서재 문이 거칠게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민수야!”
굵고 노기 띤 목소리가 적막을 찢었다.
문턱에 서 있는 이는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 박창섭(86)이었다.
아버지의 눈은 매처럼 날카롭게 민수가 쥐고 있는 낡은 장부를 향해 있었다.
마치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숨겨온 비밀을 정확히 꿰뚫어 본다는 듯.
Part 2
박창섭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그의 시선은 민수의 손에 들린 장부를 꿰뚫을 듯했다.
“그 역겨운 장부, 당장 저 분쇄기에 넣어버려.”
아버지는 손가락으로 방 한구석에 놓인 낡은 문서 분쇄기를 가리켰다.
“지금 당장 불태우지 않으면, 너는 이 가문에서 제명이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네 이름 앞에 붙은 박 씨 성도 거두어 버릴 것이며, 평생 일군 재산도 한 푼도 못 건질 줄 알아라.”
아버지는 민수에게 성큼 다가섰다.
“숙부들과 고모들, 모든 친척들에게 너를 배신자로 매장시킬 것이다.”
“가문의 수치, 패륜아로 만들어 버리겠어.”
그것은 더 이상 경고가 아니었다.
86세 박창섭의 최종 최후통첩이었다.
+ There are no comments
Add you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