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시스템적 연쇄 파산의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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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복도에서 민규에게 나의 결심을 말한 후, 며칠 동안 나는 마치 폭풍의 눈 속에 있는 듯한 시간을 보냈다. 외부에서는 아버지의 부동산 제국이 무너지는 소리가 요란했지만, 내 안은 의외로 고요했다. 모든 것을 체념한 자의 평화랄까.

아버지의 소유였던 방앗간 공장은 이미 은행의 압류 통지가 붙었다. 내가 평생을 바쳐 일했던 그곳에 이제는 붉은 딱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철거 예정이라는 현수막까지 걸려 있었다.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형님, 아버지가 계속 형님을 찾으십니다. 자신의 개인 금고를 열어 현금을 찾으려고 하시는데, 몸이 불편해서 움직이지도 못하시고…” 민규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은행에서는 뭐라고 하니?” 나는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물었다.

“예정대로 모든 담보 부동산에 대한 경매 절차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모든 은행 계좌는 동결되었습니다. 남은 재산으로는 대출금을 상환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아버지의 필사적인 저항이 부질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금융기관은 감정 없이 숫자로만 움직였다. 70년 전의 피 묻은 장부에서 시작된 거짓은, 이제 시스템적인 연쇄 파산이라는 냉혹한 현실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주변에서는 온갖 소문이 나돌았다. 박창섭 회장이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었다느니, 장남 민수가 아버지를 고발해서 집안이 망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동네 어귀에 앉아있는 노인들의 수군거림이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저 패륜아 때문에 박 회장이 저 지경이 되었다니…”

” 쯧, 자식 새끼 키워봐야 소용없다더니.”

나는 그들의 시선과 말들을 무시하며 묵묵히 길을 걸었다. 더 이상 숨을 이유도, 변명할 이유도 없었다.

며칠 후, 민규가 다시 나를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두툼한 서류뭉치가 들려 있었다.

“형님, 이것은 법원으로부터 온 통지서입니다. 아버지 명의의 모든 부동산에 대한 경매가 완료되었습니다. 그리고 은행 대출금 상환 후 남은 재산은… 없습니다. 오히려 부족합니다.” 민규는 서류를 내밀었다.

나는 서류를 받아들었다. 거기에는 ‘파산 선고’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아버지 박창섭은 이제 완전히 빈털터리가 된 것이다. 그가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50억 원 상당의 부동산 제국은 단 한 푼도 남기지 않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버지는 지금… 어떤 상태시니?” 나는 어렵게 물었다.

“아직 병원에 계십니다. 충격이 크셔서 식음을 전폐하고 계십니다.” 민규의 표정은 어두웠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아버지에게는 죽음과 같은 고통일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70년간 이어진 거짓의 사슬을 끊어내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민규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형님, 문중에서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나는 민규를 바라보았다. “무슨 회의?”

“형님을 가문에서 제명하고, 성씨를 박탈하는 안건을 논의한다고 합니다.” 민규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깊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예상했던 바였다. 아버지를 파산으로 몰아넣은 ‘패륜아’에게 가문의 이름이 허락될 리 만무했다.

“형님, 이대로 받아들이실 겁니까? 아니면 문중 어르신들을 찾아가서… 조금이라도 사정을 해보시겠습니까?” 민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문중에서 제명된다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없는 사람’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내 이름 석자 앞에 붙었던 ‘박씨’라는 성이 사라지는 것은, 내가 평생을 지탱해온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다.

“아니.”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

민규의 눈이 커졌다.

“이것이 진실을 밝히는 대가라면, 나는 기꺼이 치를 것이다.” 나는 창밖으로 멀리 보이는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가문의 이름, 재산,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70년 전의 희생자들에게 사죄하는 길이라면,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

내 마음은 이제 완전히 홀가분했다. 70년간 나를 억눌러왔던 아버지의 그림자와 가문의 명예라는 허울에서 비로소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이 모든 파멸 속에서 나는 진정한 자유를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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