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조사위원회에서의 소동 이후, 나는 가문의 완전히 버려진 존재가 되었다. 전화는 물론, 친척들의 집 문은 굳게 닫혔고, 나를 마주치는 친척들은 고개를 돌리거나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나는 이제 ‘가문을 배신한 패륜아’로 낙인찍힌 채 철저히 고립되었다.
하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70년간 짓눌려왔던 거대한 거짓의 무게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난 듯한 기분이었다. 이제 진실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갈 차례였다.
“민규야,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니?” 텅 빈 집 거실에서 나는 민규에게 물었다. 창밖으로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 밝은 소리가 내 고립감을 더욱 증폭시키는 듯했다.
민규는 테이블 위에 펼쳐놓은 낡은 지도를 가리켰다. “형님, 저희 아버지에게 토지를 맡겼던 전우 중 한 분의 미망인을 찾았습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정말이냐? 어떻게 알았지?”
“수십 년간 숨겨진 기록들을 찾아 헤맸습니다. 부산 피난민 수용소의 명단, 사망자 기록, 그리고 당시 증언록까지…” 민규의 눈은 피로했지만, 흔들림 없었다. “그분의 성함은 강순자 여사님이십니다. 올해 82세 되셨고요. 부산 영도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계십니다.”
나는 목이 메었다. 민규가 나 모르게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나를 도우려고 했던 것이지, 아버지를 돕거나 나를 배신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 마음속 깊이 박혀있던 가시가 뽑히는 것 같았다.
“연세가 많으신데… 혹시 기억이 온전하실까?” 나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 점이 가장 걱정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당시 상황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심지어 아버지께 맡겼던 토지 위탁 계약서 원본까지 가지고 계셨어요.” 민규가 말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지금 당장 가자. 부산으로.”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부산 영도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보며 나는 70년 전의 부산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던 기억들. 굶주림과 공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던 사람들.
강순자 할머니의 식당은 영도 시장 한켠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할머니 손맛 국밥’이라는 낡은 간판이 정겹게 걸려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구수한 돼지국밥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식당 안은 한산했다. 작은 테이블 몇 개가 놓여 있었고, 낡은 텔레비전에서는 아침 드라마가 흘러나왔다.
카운터 안쪽에서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의 할머니 한 분이 천천히 걸어 나오셨다. 허리가 구부정했지만, 눈빛은 형형했다. 그녀가 바로 강순자 할머니였다.
“어서 오세요. 국밥 드릴까요?” 할머니는 상냥하게 물었다.
민규가 앞으로 나서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강순자 할머니 되시죠? 저희는 박민수라고 합니다. 돌아가신 남편분 김영호 씨와 박창섭 씨에 대해 여쭤볼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할머니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그녀는 우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박창섭이라니… 그 이름은 오랜만에 듣는구먼.”
그녀는 테이블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우리는 마주 보고 앉았다. 할머니는 조용히 국밥 두 그릇을 내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국밥을 앞에 두고 나는 긴장감에 목이 타들어갔다.
“저희 아버지가 박창섭입니다.” 내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할머니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표정은 순간 어둡게 변했다. “그 양반…”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70년도 더 된 옛날 일이구먼.”
“혹시… 1951년 부산 피난민 수용소에서 저희 아버지께 토지 위탁을 맡기신 적이 있으신지요?” 민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은 먼 과거를 회상하는 듯했다. “그럼 알고 말고. 우리 영호가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박창섭 그 친구에게 토지 증서를 맡겼지. 고향에 돌아가면 꼭 돌려주라고 신신당부하면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뒤쪽 서랍을 열었다. 낡고 닳은 나무 상자를 꺼내더니, 그 안에서 누렇게 바랜 종이뭉치를 꺼냈다.
“이것 보시오.” 그녀가 우리에게 내민 것은 놀랍게도 1951년 당시의 토지 위탁 계약서 원본이었다. 종이에는 당시의 피와 땀이 얼룩져 있는 듯했다. “이거 하나는 기어코 버리지 않고 간직했지. 언젠가 진실이 밝혀질 날이 올까 하고.”
내 심장이 다시 한번 크게 울렸다. 강순자 할머니의 손에 들린 낡은 종이 한 장은 70년 동안 묻혀있던 거대한 거짓을 뒤흔들 결정적인 증거였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눈앞이 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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