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중 회의는 내가 예상했던 대로 차갑고 엄숙했다. 낡은 한옥의 대청마루에 앉아 있는 숙부들과 사촌 형제들, 그리고 아버지의 친구들까지 모두 나를 향해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대청마루 한가운데에는 붉은 인주로 찍힌 ‘제명’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족보가 놓여 있었다.
“박민수.” 숙부 덕수가 낮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함께 체념이 섞여 있었다. “네가 박창섭 노인을 파산시키고 가문을 욕보인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 문중의 결정에 따라, 너는 이 순간부터 박씨 가문에서 제명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입에서는 어떤 변명도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변명할 생각도 없었다.
“네 이름 앞에 붙었던 ‘박’이라는 성도 박탈된다. 너는 더 이상 박민수가 아니다.”
이어서 사촌 형제 중 한 명이 나에게 소유권 포기 각서를 내밀었다. “네가 평생 일군 방앗간 공장의 모든 소유권도 포기해야 한다. 그곳은 이제 더 이상 네 것이 아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각서에 서명했다. 펜 끝에서 잉크가 번지는 순간, 내 평생의 노력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50억 원 상당의 방앗간과 토지,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내 모든 추억과 노력이 이제는 남의 것이 되는 순간이었다.
영희는 대청마루 한켠에 앉아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녀는 차마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민규는 내 옆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은 나에게 연민과 존경을 동시에 보내고 있었다.
“너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숙부 덕수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경멸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저는 이제 진실을 밝힌 사람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내 말에 대청마루 안은 더욱 싸늘해졌다. 아무도 내 말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가문의 명예와 재산만을 생각할 뿐이었다.
회의가 끝난 후, 나는 조용히 대청마루를 나섰다. 쌀쌀한 가을바람이 내 볼을 스쳤다. 마치 모든 것을 잃은 나를 위로하려는 듯했다. 문밖에는 민규가 기다리고 있었다.
“형님…” 민규가 내 어깨를 잡았다. 그의 손길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괜찮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게 진실의 대가라면, 기꺼이 치러야지.”
민규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안아주었다. 그의 품에서 나는 70년 전의 비극적인 피난길에서 내가 잃었던 것들을 다시 떠올렸다. 가족의 따뜻한 온기, 진실된 삶의 의미.
“이제 마지막 절차가 남았습니다. 특별토지위원회에서 최종 공개 판결 청문회가 열립니다.” 민규가 말했다. “윤성호 위원장이 직접 당시 기록들을 낭독할 예정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야지. 내가 시작한 일이니, 끝까지 지켜봐야지.”
청문회는 며칠 뒤에 열릴 예정이었다. 나는 그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70년 동안 묻혀 있던 진실이 세상에 드러나는 날, 그리고 내가 진정한 자유를 얻는 날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아침, 뜻밖의 방문객이 찾아왔다. 바로 아버지였다. 그는 민규의 부축을 받으며 내 작은 셋집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예전의 위엄 있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초라하고 연약한 노인의 모습이었다.
“민수야…” 아버지는 힘없이 내 이름을 불렀다. 그의 눈빛은 슬픔과 함께 어떤 간절함을 담고 있었다.
“아버지…”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한때 나를 억압했던 절대적인 권위는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가지 마라. 청문회에 가지 마라.” 아버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애비가, 이 늙은 애비가 너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한다. 제발 이대로 덮자꾸나. 더 이상 이 애비를 욕보이지 마라.”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버지의 눈물을 본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나는 그의 눈에서 과거의 비겁함과 현재의 절망을 동시에 보았다.
그의 애원은 내 마음을 흔들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던가. 평생 나를 억압했지만, 그는 내 아버지였다. 나는 망설였다. 이대로 청문회에 가지 않는다면, 이 모든 고통을 멈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유혹이 나를 흔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 저는 이미 너무 멀리 왔습니다. 돌아갈 수 없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절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의 마지막 애원을 뒤로 한 채, 청문회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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